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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전자책] 파도에 새겨진 시간 4화 - 미리 보기

by peytonkim 2026. 7. 31.

글 : Peyton Kim , AI(Gemma4)

그림 : Copilot, Gemini

본 소설은 역사적 사실을 모티브로 창작된 허구입니다. 등장하는 인물, 지명 단체 및 사건은 실제와 다를 수 있으며,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재구성되었습니다.

1903년 ~1905년 대한제국 시절 가장 먼저 일제 강점기를 맞이한 울릉도와 독도! 윤서의 기억을 따라 비참했던 역사의 기록을 되짚어 볼 시간입니다. 멸종되어 버린 강치!! 지금은 다시 볼 수 없는 그 고귀한 생명체의 숨결을 지금 만나 보시죠.


103. 상흔 위에 핀 온기

 

새벽을 밀어내고 솟은 울릉도의 아침은 비현실적일 만큼 푸르렀다. 밤새 짙게 깔렸던 해무가 걷히자, 쏟아지는 햇살이 바다 위에 부서지며 마치 보석 가루를 뿌려놓은 듯 찬란하게 일렁였다. 깎아지른 듯한 기암괴석들은 안개 사이로 신비로운 자태를 드러내며 경이로운 풍경을 자아냈다.

윤서 모녀는 관아에서 파견된 안내인 진수를 따라 해안가를 거닐었다. 심 군수의 명에 따라 머물 곳을 찾는 여정이었다. 윤서는 새벽부터 짐을 챙겨야 했던 고단함도 잊은 채, 해맑은 웃음을 머금고 종종걸음으로 앞서 나갔다. 해란은 그런 딸의 손을 꼭 쥐며 인자한 미소로 그 뒤를 따랐다.

진수의 안내로 멈춰 선 곳은 마을 외곽, 산줄기 중턱에 자리한 작은 너와집이었다. 험준한 산이 집을 포근히 품고 있었고, 그 옆으로는 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담장 너머로는 닭장과 화장실이 보였고, 가지를 뻗은 작은 감나무 한 그루가 마당 한복판에 서 있었다. 집 앞에는 울도의 절경이 소박하면서도 압도적인 풍경으로 펼쳐졌다.

“이보시오! 계시요? 아무도 없소?”

진수가 문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이내 방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춘식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문을 열고 나왔다. 태산 같은 체구에 세월의 풍파가 엉겨 붙은 덥수룩한 수염, 급히 나온 탓에 헝클어진 머리 위로 삐뚤어진 상투가 보였다. 풀어진 옷고름에 가슴팍이 드러나 있었고 해란은 그 모습을 보고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춘식은 갑작스러운 손님의 등장에 당황하며 한쪽 팔로 옷고름을 거칠게 여몄다.

“이른 아침부터 거 누구시오?”

그의 목소리는 성격만큼이나 크고 급했다.

“이분들은 제주에서 온 해녀들이오. 물고기를 잡으러 왔다 합니다. 당분간 머물 곳이 필요해서 군수님의 명으로 방을 구하러 다니는 길이라오. 혹시 남는 방 하나 있소?”

“방이야 있지. 그런데 아무한테나 방을 내줄 수는 없지 않소?”

진수의 물음에 춘식이 눈을 흘기며 퉁명스럽게 맞받아쳤다.

“거 인심 좀 쓰쇼. 울도 인심이 이렇게 팍팍하다는 소릴 들어야겠소?”

진수가 야박하다는 듯 타박을 하던 그때, 방문이 열리며 미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춘식의 아내였다.

“일단 안으로 들어와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누추한 집이긴 하나 아직 아침이 쌀쌀하니, 따뜻한 차라도 한잔하며 몸이라도 녹이시지요.”

미란은 단아하고 청초한 자태로 부드럽게 권했다. 그녀의 온화한 목소리는 날카로웠던 공기를 단숨에 무디게 만들었다. 춘식은 자신의 무례함이 무안했는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흠. 들어오시오.”

* * *

좁은 방안에 진수와 윤서 모녀, 춘식이 둘러앉았다. 그들 사이에는 낯선 이들이 마주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미란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반상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한 주전자가 들려 있었다.

“한번 드셔 보세요.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미란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진수와 해란은 말없이 찻잔을 받아 들었다. 윤서 역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찻잔을 바라보다가, 엄마를 졸라 한 모금 머금었다.

“와, 차가 향긋하고 달콤하면서 시원해요.”

아직 맛 표현이 서툰 아이의 순수한 감탄에 미란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그래, 네 말이 맞구나. 이 차는 ‘감로차’라고 한단다. 울도 나리 분지에서 자생하는 산수국을 채취해 정성껏 덖고 말려서 만든 것이지.”

미란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그윽한 향이 배어 나오는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감로란 원래 ‘하늘에서 내리는 달콤한 이슬’이라는 뜻인데, 향긋하면서도 깊고 청량한 단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란다.”

“아주 맛이 좋습니다.”

미란은 그 진심 어린 찬사에 가만히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해란 또한 처음 느껴보는 그 맛에 감탄하며 만족스러운 듯 감사 인사를 건넸다.

“감로차라는 이름에는 ‘스님들의 눈물과 기도’가 얽힌 전설이 있습니다. 옛날 깊은 산속에서 수행하던 스님들이 가뭄과 배고픔에 쓰러져가는 민중들을 보며 간절히 기도했더니, 다음 날 잎사귀마다 이슬이 맺혀 마치 단비처럼 내려왔다 하더군요. 그 잎을 따서 차를 끓여 마시면 기운이 나고 갈증도 해소된다 하여 스님들이 아주 귀하게 여긴 차이지요.”

미란의 설명에 춘식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의 눈빛은 차분해져 있었으나 그 깊은 곳에는 알 수 없는 회한이 서려 있었다.

“그 절이 지금도 있습니까?”

해란의 물음에 춘식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통일신라 시대까지는 그 흔적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고 하나 지금 울도에 남겨진 사찰이 없습니다. 모두 불타 없어졌는지…. 다만 현포동 고분군 근처에 남겨진 사찰 터 한 곳이 있을 뿐이지요. 사람들은 그곳의 돌기둥을 바다를 지키는 성스러운 문이라 믿으며 풍어제를 올리곤 합니다. 그곳에서 조용히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신비로운 노랫소리가 들린다는 전설도 있고요.”

해란은 흥미로운 듯 춘식의 말을 경청했다. 이윽고 그녀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신기하군요. 나중에 꼭 한번 들러봐야겠습니다.”

“더 주세요.”

“아유, 예쁜 것…. 차도 잘 마시네. 이것도 먹어볼래?”

윤서가 찻잔을 내밀며 해맑게 웃었다. 미란은 그런 윤서가 예쁜 듯 차를 다시 채워주었다. 그러고는 벽장에서 잘 익은 곶감을 꺼내 윤서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그 아이도 살아 있었다면, 딱 너만 한 나이였을 텐데….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병으로 떠났다오. 무엇이 그리도 급했는지……”

미란의 눈가에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윤서는 곶감을 두 손으로 받아 들고 말없이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그 어린아이의 체온이 닿는 순간, 미란은 가슴 속 깊이 얼어붙어 있던 무언 가가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해란은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며 저릿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눈시울을 붉혔다.

“에잉, 거…. 아까 내 말투가 좀 퉁명스러웠소. 내 성격이 워낙 불같아서 말이오. 미안했소이다.”

춘식이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깨뜨리려 애썼지만, 그의 눈 역시 이미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미란은 남편의 거친 행동 뒤에 숨겨진 상처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서방님의 행동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다 저를 지키지 못했다는 미안한 마음 때문이니….”

해란은 춘식의 옷소매 끝으로 드러난 상처를 발견하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쩌다… 팔 한쪽을 잃으셨습니까?”

미란이 남편의 손을 잡으며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그게 다 저 때문입니다. 원래 저희는 도동 해안가에서 평화롭게 터를 잡고 살았지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일본인들이 마을로 들이닥쳐……. 제게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수치스러운 짓을 저질렀습니다. 이에 남편은 화를 참지 못해 낫을 들고 다 죽이고 자신도 죽겠다는 걸, 마을 사람들이 말리고 말려서 다 같이 몰려가 강력하게 항의하였는데 그놈들이 되레 총과 칼로 위협하며 기세를 부렸고…. 저들을 막아서다 한쪽 팔을 잃은 것이지요.”

미란은 그날의 기억이 몹시 침통한 듯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런데 더 원통한 것은 전임 이방이 그놈들의 위협에 눌려, 마을의 나무를 베어가도 좋다는 벌목 허가증을 내주며 사건을 대충 마무리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이 가슴속에 맺힌 한과 울분이 저토록 깊은 것입니다.”

미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춘식의 상처 입은 팔 만큼이나 깊고 아팠다.

“그것이 어찌 미란 씨 탓이겠소. 나라가 제구실을 하지 못해 저런 무도한 자들을 막지 못한 것이 죄지…. 나라에 힘이 없으니. 백성들 가슴에 저토록 깊은 상흔만 남는구려.”

그날의 진실을 알고 있는 진수 또한 울분 어린 현실 앞에 주먹을 꼭 쥐며 낮게 읊조렸다.

해란은 말없이 미란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그녀의 따뜻한 온기와 다독임은 말 없는 위로이자 깊은 공감이었다. 그녀의 위로에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미란은 눈물을 훔치며 입을 열었다.

“누추한 집이라 송구합니다만, 괜찮으시면 이곳에서 함께 지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옆방이 비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염치 불고하고 당분간 신세 좀 지겠습니다. 받으세요. 얼마 되진 않지만, 제주에서 올라와서 방을 구하기 위해 마련했던 돈입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미란의 권유에 해란은 감사한 마음을 느끼며 품 안에서 돈뭉치를 꺼내 주었다.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넣어두세요. 앞으로 물질해서 매달 방세는 낼 터이니 잘 부탁드립니다.”

해란의 단호한 태도에 한사코 마다하던 미란과 춘식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롭게 엮인 인연의 꽃을 피우며, 그들의 온기는 서로의 깊은 상흔 위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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